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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0 08:05:07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서 아빠를 불렀다. “ 아빠, 우리집에 도랑이 생겼어요. 좀 있으면 가재랑 개구리도 놀러 오겠네요.”

지난 여름부터 파기 시작한 구덩이에 빗물이 고였다 빠지기를 여러번. 아침운동 삼아 파기 시작한 구덩이가 이제 제법 그 모양새를 갖췄다. 마당 한쪽으로 길이 10m, 폭 40㎝, 깊이 1m의 기다란 구덩이를 파기까지 서너달은 족히 걸린 듯하다. 마당은 그 동안 파놓은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두 아들 녀석한테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놀이터였을 게다. 동네사람들도 마당 한 쪽에 쌓아둔 소주박스들과 그 기다란 웅덩이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또 이번엔 뭘 하나 싶은 눈초리였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올해, 우리집 마당은 비만 오면 진흙투성이였다. 물론 마사토를 깔긴 했지만 집 앞 과수원에서 내려오는 물이 도랑을 넘쳐 마당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항시 물이 많았다. 일반적으로는 마당에 배수관을 설치해서 하천으로 흘려보내도록 되어 있지만 우리집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가능한 우리집 마당에서 침투되고 저류시키고자 한 것이 나의 의도였다.

그렇게 해서 파 놓은 구덩이에 시중에서 쓰는 플라스틱 소주박스 70개 정도를 묻었다. 아마도 그곳에 저류되는 빗물의 양은 최대 박스 부피의 95% 정도인 3t 가량 될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도시에서 발생되는 홍수피해를 저감시키는 시설로 빗물침투시설이나 저류박스와 같은 것이 상당히 실용화되어 있고 상품화된 것도 많다. 특히 대규모로 저류시설을 조성할 때 쓰이는 저류박스는 기존의 자갈이 갖는 공극률 이상으로 물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효과면에서 뛰어나다. 그래서 나도 꿩 대신 닭이라고 소주박스를 대신해 묻게 된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집 주위로 집이 20-30채뿐이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외곽도로와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점점 주변이 개발되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 집 윗쪽으로도 100여 필지가 개발되고 있는데, 결국 집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면적이 줄어들고 자연히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빗물의 양이 일시에 많아지고 하천은 그만큼 부담을 안게 되어 우리 주변의 자연을 하나둘씩 잃어버리게 한다.

내 집 마당에 떨어지는 빗물은 내 집에서 모아 천천히 땅속으로, 하천으로 흘려보내 준다면 건강한 땅과 자연이 함께 하는 하천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한다. 공사 내내 흙을 밟고 놀며, 흙 속에서 땅강아지를 찾으며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길이 어렵지만은 않은 길임을 알게 되었다.

이태구/세명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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