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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지기

[펌] 절실함, 가벼움

Escaper 2023. 2. 18.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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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다녀왔다. 어떤 모임의 회원들끼리 떠나는 2박3일의 투어를 따라간 것인데, 하루 세끼 열성적으로 챙겨먹는 것을 비롯해서 사소한 것에 기뻐하고 자기 내면과 타인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상식을 실천하는 모습이 도리어 신기하더니, 이내 내 몸과 마음을 볕에 구워 말리는 느낌이었다.

가이드를 자임한 동행의 제안에 따라 김영갑 갤러리에 들렀다. 작가가 별다른 상업적 활동 없이 20년 이상 제주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동행의 설명에 “부자 예술가인 모양이군요”라고 무심코 말했던 나는 그곳에서 집어든 책을 일별하며 말문이 막혔다. 버스값 아끼느라 걸어다니고 아침에 속을 달랠 우유 한잔을 자제하면서도 끄떡없던 사람이,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져가면 뿌리 잘린 풀마냥 작은 충격에도 중심을 잃는다고 썼다. 필름이 없으면 눈으로 찍고 마음으로 인화를 하며 다른 내일을 기다렸다고 했다. 제주에 매혹되어 그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사진에 담아온 이 사람은 루게릭 병으로 카메라를 내려놓게 되자 병원에서 선고한 여생을 갤러리 만드는 데 바치고 있다. 그의 갤러리는 제주의 특징을 소박하지만 깊은 안목으로 형상화하면서 4년에 걸쳐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문화관광부에서 갤러리 사업을 도와주겠다고 했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한 끝에 김영갑 작가는 “제주에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뒤에 생략된 말은 ‘없어져도 할 수 없고’쯤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죽음 직전의 사력까지 다하고 있는 사람의 이런 태도는 나에게 경미한 쇼크를 주었다. 빗물에 젖어 유독 새카맣던 현무암이 시각적으로 내뿜던 위압감과 다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관광객의 화사한 시선을 받으며 시치미 떼고 있던 제주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진중한 본질을 흘낏 노출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저 훌륭한 가이드의 소개팅 소식을 들었다. 결과를 궁금해 하는 동료들에게 당사자는 “집행유예”라는 메시지를 알려왔다. 여자는 얼굴 예쁘면 무죄, 안 예쁘면 유죄라는 게 그의 지론이니 판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얼굴이라는 뜻이었다. 대신 그는 상대방 여성을 자신이 무척 사랑하는 그 모임의 회원으로 초대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결혼하느냐 마느냐를 즐거운 게임처럼 여기며 자신의 베아트리체를 발견하겠다는 꿈을 접지 않는 그는 오늘도 “내 나이 갓 마흔”을 외치며 열정적으로 행복하게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돌보고 멋 부리며 사는 중이다.

제주행을 계기로 만나고 생각하게 된 두 사람에게서 나는 예술로 가는 서로 다른 두 길을 본다. 절실함과 가벼움이 제각각 지극해지면 어떤 경지에서 서로 만나는 것 같다.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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