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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지기

모란이 피기까지는

Escaper 2024. 2. 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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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독毒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달 ・ 포도 ・ 잎사귀

                                                          장만영

순이, 버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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